제주 2공항 갈등 10년…도민의 주권 존중해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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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늦은 오후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신양포구 바닷가에서 겨울철새인 홍머리오리들이 쉬고 있다. 서보미 기자

강우일 | 주교·천주교 제주교구 전 교구장

 저는 18년간 천주교 제주교구장으로서 아름답고도 슬픔이 깊은 섬 제주를 지켜보며 살아왔습니다. 제주 땅이 품고 있는 자연의 신비와, 4·3이라는 뼈아픈 역사를 겪어낸 도민들의 상처를 함께 나누며, 이 섬이 걸어온 길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제주의 바람과 오름, 곶자왈의 나무들 속에서 하느님 창조의 섭리를 느꼈습니다. 척박한 화산섬에서 모진 세월을 오직 근검과 공동체 정신으로 오늘의 제주를 일구고 가꾸어온 제주 사람들을 보면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시에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쉽게 이 신비로운 자연과 인간의 존엄을 앗아갈 수 있는지 똑똑하게 목격했습니다.

하느님 창조질서의 보고(寶庫)가 지금 병들고 있습니다. 무분별한 개발로 숲은 끊기고, 바다는 하수와 쓰레기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개발을 둘러싼 갈등과 반목으로 오랫동안 의지하며 살아온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제 제주 제2공항 건설 계획이 발표된 지 꼭 10년이 되었습니다. 공항은 하늘길을 여는 문이지만, 제2공항 논의는 제주의 생명과 미래를 가르는 문턱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단순한 지역 개발의 사안이 아니라, 하느님 창조질서에 대한 신앙의 물음이자 우리 사회의 도덕적 양심을 비추는 거울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정부는 공항 포화 해소와 관광 수용 확대를 제2공항 추진의 이유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 논리의 바탕에는 여전히 양적 성장의 환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미 제주는 하와이나 오키나와보다도 많은 관광객이 찾는 섬이 되었습니다. 이 작은 섬이 연간 2천만명 이상의 방문객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쓰레기, 하수, 지하수, 교통, 주거 등 이미 한계에 다다른 제주의 인프라는 제주가 지속가능성의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주의 진정한 가치는 도시의 화려한 건축물이 아니라, 바람이 부는 오름과 낮게 깔린 돌담, 그 위에 흐르는 평화입니다. 제주를 찾는 이들은 소비가 아니라 치유를 찾기 위해 이곳을 찾습니다. 그 치유의 근원은 화산섬 제주만이 지닌 자연의 신비함에 있습니다.

제2공항 갈등의 본질은 민주주의와 인간 존엄의 문제입니다. 저는 여러해 전 제2공항 후보지 마을의 주민들을 만나 그들의 절망과 눈물을 직접 보았습니다. 선조 대대로 피와 땀으로 일군 땅을 하루아침에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단순한 재산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제주에만 남아 있는 멸종 위기의 여러 생명체들과 제주인들이 더불어 지켜온 생명 공동체를 영구히 파괴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성장’과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재생과 회복이 불가능한 생태계의 붕괴를 초래하려 하고 있습니다.

제2공항 예정지는 철새도래지로 둘러싸인 새들의 낙원입니다. 전략환경영향평가에서도 제2공항 예정지는 지난해 말 참사가 발생한 무안공항은 물론 현재 운영 중인 어떤 공항보다도 조류 충돌 위험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게다가 제2공항 부지 일대는 수많은 오름이 분출하면서 만들어진 용암지대로 천연 동굴과 숨골, 오름이 밀집된 곳입니다. 이런 이유로 환경부도 ‘공항이 들어서기에는 부적절한 입지’라고 전략환경영향평가를 반려했던 것입니다.

제주는 아직도 4·3의 트라우마를 화해와 상생으로 치유하려고 몸부림치는 아픈 섬입니다. 제주 공동체는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갈등으로 또 한번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제주는 이제 참으로 평화를 갈구합니다. 제주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와 후손들에게 둘도 없는 소중한 보물입니다. 아무리 큰 자본을 투입해서도 다시는 만들어낼 수 없는 희귀한 자산입니다. 제주 제2공항 문제는 단순히 하나의 시설을 짓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제주, 어떤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줄 것인가를 묻는 양심의 문제입니다.

이재명 정부가 제2공항 문제에서도 국민주권, 주권재민의 정신을 발휘하기를 기대합니다. 제주 제2공항은 단순한 지역 현안이 아니라 국민주권과 생명존중의 시금석입니다. 제주도민에게 충분한 숙의의 기회를 보장하고, 도민이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존중해주십시오. 그것이야말로 국민주권정부의 핵심 가치이며, 민주주의의 완성입니다. 제주도민의 숙의와 결정을 통해 10년 동안 이어져온 갈등이 정의롭고 평화롭게 해결된다면, 이 나라 정치와 행정에 새로운 문화를 여는 상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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